『물가에 모인 문장들』

특집기획
『물가에 모인 문장들』
제1회 — 환벽당(環碧堂)
  • 입력 : 2026. 08.07(금) 07:03
  • 최치헌
5월의 환벽당
[담양신문] 증암천 문장 네트워크의 허브, 물소리가 먼저였다.

언덕을 오르기 전, 아래에서 증암천이 소리를 낸다. 물이 바위를 감돌며 흘러가는 소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소리. 발걸음을 멈추면 그 소리만 남는다.

언덕 위 환벽당 마루에 앉으면 세 방향이 트인다. 남쪽으로 무등산이 어깨를 드러내고, 북쪽으로 성산 쪽 능선이 흘러가고, 아래로 자미탄(紫薇灘)—배롱나무 꽃이 피는 여울—이 번쩍인다. 정자는 반듯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 가운데 두 칸은 방이고 앞과 오른쪽은 마루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붙드는 자리다.

환벽(環碧). 푸르름이 고리를 이루는 곳. 이름을 지은 이는 신잠(申潛)이다. 이 정자를 세운 이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다. 홍문관 교리를 거쳐 나주목사를 지낸 그는 을사사화 이후 낙향했다. 권력의 한복판에서 물러나, 물 흐르는 언덕 위에 마루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一洞之三勝 — 한 물줄기 안의 세 명승

어느 날 김윤제는 꿈을 꾸었다.

증암천 용소(龍沼) 깊은 물속에서 용이 노닐었다. 잠에서 깬 그는 조대(釣臺)—낚시하는 바위—로 내려갔다. 그물이 당겨졌다. 그날 용소에서 올라온 것은 물고기가 아니었다.

소년의 이름은 정철(鄭澈)이었다.

아버지 정유침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집안이 무너진 뒤, 소년은 전라도 담양 지실마을로 흘러왔다. 증암천 건너편 마을이었다. 김윤제는 그를 보고 외손녀를 맺어주겠다고 했다. 꿈 속의 용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년은 그로부터 열세 해를 이곳에서 살았다. 스물일곱에 관직에 나갈 때까지.

그 열세 해 동안 환벽당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임억령(林億齡).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송순(宋純). 고경명(高敬命). 김성원(金成遠). 백광훈(白光勳).
지금 이름 하나씩 읽으면 조선 중기 사림의 지도가 그려진다. 이들은 이 물가에 모여 시를 읽고, 술잔을 돌리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제의 집은 쉬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을 연결하는 곳이었다.

증암천 건너 250미터에는 식영정(息影亭)이 있었다. 김성원이 세운 정자였다. 두 정자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 사람들이 오갔다. 주인들이 오가기 위해서였다. 다리 위에서 사람이 오고, 문장이 오갔다. 면앙정 송순은 훗날 소쇄원·식영정·환벽당 세 곳을 가리켜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했다. 한 물줄기 안의 세 명승. 하나의 개울이 세 개의 세계를 이어붙인 것이다.

플랫폼, 혹은 도서관 없는 서재

조선의 정자는 흔히 '은둔의 공간'으로 설명된다. 세상을 등진 선비가 물가에 앉아 시를 읊는 이미지. 그러나 환벽당을 그렇게 읽으면 절반이 빠진다.

김윤제는 물러났지만 잊히지 않았다. 임억령의 시가 현판에 걸렸고,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환벽당에 남겨진 이름들—임억령·기대승·송순·김인후·고경명·백광훈·정철—은 각자의 서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여기 모인 것은 김윤제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가르쳤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마루를 열어두고, 밥을 짓고, 강을 두었다.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어떤 이는 며칠 머물렀고, 어떤 이는 십 년을 살았다. 환벽당은 지금 말로 하면 일종의 플랫폼이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이 마루를 거쳐 나갔다.

증암천 건너편 식영정을 배경으로 「성산별곡」이 지어졌고, 환벽당은 그 문학적 토양을 함께 한 공간이었다. 고경명의 문장이 이 언덕을 배경으로 자랐다. 기대승의 논변이 이 마루에서 날카로워졌다. 광주와 담양의 경계에 걸친 이 물가에 문장이 꽃핀 것은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십 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성산별곡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소년들 중 한 명인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그해 담양에서 6천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을 돌렸고, 창을 들었다. 젊은 날 이 마루에서 시를 쓰던 손으로.

그는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들 고인후도 같은 전장에서 죽었다. 후일 사람들은 말했다. 여름비를 여러 번 맞았는데도 시신이 썩지 않았다고. 산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고.

환벽당에서 시를 배운 사람이 의병이 되었다. 시와 창이 한 몸에서 나왔다. 이 물가의 정자가 단순한 풍류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 장면 하나로 이미 충분하다.

마루에 잠깐 앉아 있었다.

증암천 소리가 올라왔다. 변하지 않은 것은 물소리뿐이었다. 마루의 나무는 낡았고, 현판의 글씨는 오래된 것이었고, 관광 안내판이 아래쪽에 하나 서 있었다.
누군가 다리를 건너 오고 있었다. 지금은 옛 다리가 아니다. 콘크리트 다리다. 그 위를 지나는 사람의 발소리가 물소리와 섞였다.

배롱나무 한 그루가 언덕 아래에서 아직 붉었다.
물은 오래전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물가의 문장은 마루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자 최치현


필자 최치현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를 역임했으며, 숭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으며,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등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동서양의 고전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도 이끌고 있다.

월간중앙에서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을 연재했으며, 일본 문화와 엔카, 동아시아 인문 분야를 꾸준히 집필해왔다. 현재는 담양에 머물며 담양 정자문화와 가사문학 공간을 답사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남미 여행 인문 에세이와 도시 관찰을 바탕으로 한 문학 에세이도 집필하고 있다.



최치헌 dysm.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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