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에 모인 문장들』

특집기획
『물가에 모인 문장들』
제2회 식영정(息影亭) — 그림자가 쉬는 자리
  • 입력 : 2026. 08.21(금) 10:18
  • 최치현
식영정
[담양신문] 오후의 소나무 그늘이 마루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솔잎은 흔들렸지만, 그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광주호를 내려다보았다. 물은 잠잠했다. 예전에 이 아래로 창계천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자는 작았다.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 온돌방 하나와 마루가 절반씩. 멀리서 보면 물가에 띄운 작은 배 같았다고 한다. 지붕은 띠풀이었고 차양은 대발이었다. 지금의 기와지붕은 그 시절의 것이 아니다. 현판도, 기둥도, 마루판의 결도 모두 다른 시간의 것들이다. 남아 있는 것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굽은 소나무와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시간을 붙들고 서 있었다. 배롱나무는 열몇 그루쯤 될까. 갈 때마다 세어보지만 끝내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息影, 그림자가 쉬는 자리

그림자를 버린 사람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1545년 금산군수로 있었다. 한양에서 연락이 왔을 것이다. 동생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했다는 소식. 호조판서 자리에 있던 동생은 윤원형 편에 서서 대윤의 선비들을 몰아냈다. 을사사화였다. 백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임억령은 관직을 버렸다. 연락을 받은 날로부터 며칠이 걸렸는지, 혼자였는지, 누구와 상의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 뒤 동생이 공신 녹권을 보내왔다. 공신이 되면 품계가 오르고 집안의 명예도 높아진다. 임억령은 그 녹권을 불태웠다. 분노였는지, 부끄러움이었는지, 침묵이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그는 해남으로 내려갔다. 세상은 그를 물러난 사람이라 했지만, 그는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관직 생활 스무 해를 뒤로한 채였다.

을사사화가 지나간 뒤인 1552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부승지와 병조참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리고 1557년 담양부사로 부임했다.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담양부사 임기를 마친 뒤에도 그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사위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창계천 언덕 위에 정자를 지었다. 1560년이었다. 임억령은 「식영정기」를 썼다. 장자의 우화를 끌어왔다.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해 달아나다 지쳐 죽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그늘에 들어가면 그림자는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다.

임억령은 그 이야기 끝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림자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함께 끝없는 들을 노닐기 위해 이곳에 왔다.“

붓을 쥔 손이 잠시 멈췄을지도 모른다. 그 손은, 한때 동생이 보내온 공신 녹권을 태워버렸던 바로 그 손이었다.

사선(四仙)이 내려앉은 자리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정철(鄭澈, 1536~1593)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다. 이들은 성산의 아름다운 스무 경치를 골라 각자 스무 수씩, 모두 여든 수의 시를 남겼다. 『사선이십영(四仙二十詠)』. 이 시회는 훗날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진다. 조선 문학사에서 한 공간을 중심으로 이렇게 집단적인 시 창작이 이루어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제1회에서 소개한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金允悌, 1501~1572)는 김성원의 스승이었다.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에는 창계천이 흘렀고, 두 사람은 무지개다리를 놓아 서로 왕래했다고 전한다. 다리 아래에는 배롱나무가 줄지어 섰다. 한여름이면 붉은 꽃이 물 위로 떨어졌고, 그래서 이곳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

정철은 이 풍경 속에서 자랐다. 열 살 무렵 담양으로 내려와 환벽당에서 김윤제에게 글을 배우고, 식영정에서는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다. 김성원과 고경명은 평생의 벗이었다.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 김윤제의 환벽당,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 임억령의 식영정. 호남가단은 이 물가에서 태어났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서울 생활을 접고 담양에 머물던 시절에 쓰였다. 그러나 그 글이 완성되었을 때 식영정을 세워준 임억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스승은 떠났지만 풍경은 남았다. 정철은 스승이 앉던 자리에 앉아 스승의 풍경을 노래했다.
식영정에서 바라본 전경

수몰된 강

1970년대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으로 증암천을 막아 광주호가 만들어졌다. 1976년 댐이 완공되면서 식영정 앞 창계천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배롱꽃이 흐르던 자미탄도, 정철이 낚시를 드리웠다는 조대(釣臺)도, 임억령이 이름 붙인 노자암(鸕鶿巖)도, 방초주(芳草洲)도, 모두 호수 아래 잠들었다. 풍경은 사라졌지만, 시 속의 풍경만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지금 식영정 아래는 호수다. 예전부터 살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떠났다. 논과 밭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생태공원이 들어섰다. 버들길, 풀피리길, 별뫼길. 이름은 옛것을 빌렸지만 길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안내판에는 명승 제57호라고 적혀 있었다. QR코드를 찍으면 해설이 흘러나온다. 시간은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옛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기둥

마루를 내려오다 기둥 하나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손을 대보았다. 구멍이 깊었다. 크고 작은 벌레 자국이 나뭇결을 따라 번져 있었고, 갈라진 틈마다 오래된 그늘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내판에도, QR코드 해설에도 이 구멍에 대한 말은 없었다.

관광버스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안쪽에서 누군가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렌즈는 처마와 현판을 향했다. 기둥의 밑동까지는 닿지 않았다.

필자 최치현


필자 최치현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를 역임했으며, 숭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으며,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등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동서양의 고전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도 이끌고 있다.

월간중앙에서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을 연재했으며, 일본 문화와 엔카, 동아시아 인문 분야를 꾸준히 집필해왔다. 현재는 담양에 머물며 담양 정자문화와 가사문학 공간을 답사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남미 여행 인문 에세이와 도시 관찰을 바탕으로 한 문학 에세이도 집필하고 있다.


최치현 dysm.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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